월요일, 엘사는 아침에 일찍 회사에 도착했다. 평상시라면 몸을 질질 끌고 문을 열었을 터인데 – 그녀는 많은 아침 시간을 시계 똑딱이는 소리를 두려워하며 보냈는데, 그것이 그녀가 차에 올라타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야 할 시간이 임박했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하지만 오늘만큼은 시계를 똑바로 응시했고 빨리 가길 기다렸다. 그러면 마침내 안나를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마침내 기다리던 8시가 되었고 그녀는 가방을 꽉 쥐고 차 문을 열고 나왔다.


마음속에 행복감이 완벽하게 차올랐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웃음이 났고, 차에서 나와 빌딩으로 빠르게 걸어 들어가는 두 발이 둥둥 떠있는 기분이었다. 멍하니 있던 안내데스크에 있는 경호원이 엘사를 다시 확인할 정도였다.


“어서 오십시오. 대표님.” 그 여자가 말했다. 엘사는 그녀의 놀란 표정을 눈치챘다.


“음.. 안녕하세요.” 엘사는 그녀에게 미소 지었다. 엘사는 문득 이 여자가 매일 아침마다 인사를 한지 2년이 지났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그때마다 엘사도 인사했다. 일상적이고 기본적인것만 했지만. 아버지가 항상 정중해야 한다고 가르쳐 왔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엘사는 지금까지 한 번도 가는 길을 멈추거나 진심으로 쳐다본 적은 없었다.


“오늘 어때요?” 엘사가 물었다.


인사를 받은 여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순간 더듬거린다. “아..네.. 좋습니다. 대표님 기분은 어떠세요?”


“좋아요. 물어봐줘서 고마워요.” 엘사의 입꼬리가 다시금 올라가고 손까지 흔들더니 엘리베이터로 갔다. 당혹스러워 하는 시선에 엘사는 순간 뒤통수까지 따가울 정도였다.


그러나 안나는 아직 안 온 듯 했다. 물론 아직 안 왔을 시간이다. 아직 15분밖에 안 지났으니까. 지금까지 안나를 보아온 바로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을 수 있다. 그 생각에 엘사는 웃음이 나왔다. 자느라 헝클어진 사자 머리와 졸음이 가득한 눈이 어느새 익숙해졌다.


안나의 책상 끝부분에 살짝 걸터앉아 핸드폰을 꺼냈다. 문자를 보낼까 잠시 생각했다가 너무 과한 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긴 싫었다. 둘은 토요일 하루 종일 서로 꼭 껴안은 채 안나가 고른 티비 프로를 같이 봤다. 안나가 뭔가 할 일이 생길 때만 잠시 껴안은 팔을 풀었다. 그리고 떨어져 있었던 일요일 하루는 엘사에겐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고작 하루뿐이었잖아. 엘사는 자책하고 핸드폰을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거머리도 아니고. 집착할 필요는 없으니까.


문득 안나의 책상에 앉아 기다리고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앞서 나가는 거 같았다. 엘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절부절 두 손을 만지작거렸다. 거의 제 사무실로 들어갈 뻔 했지만, 지금 당장 안나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사무실을 그냥 편하게 걷고 있으면, 오! 안나가 도착할 때 내가 어디론가 가고 있는 척 하면 어떨까? 내 사무실로 가는척 할까 아님 화장실로 할까.


사무실 안을 빙 둘러 걸었다. 창문 밖을 주의해 보면서. 지하철에서 빠져나와 이 빌딩안으로 걸어오는 안나가 보이는 것 같았다. 사실 전혀 보일 리가 없었다. 엘사는 지금 맨 꼭대기 층에 있었고 안나의 것으로 추정되는 빨간머리는 보이지도 않으니까.


세상에. 원을 그리며 걸으며 엘사는 점점 미칠 것 같았다. 손목을 한번 꼬고는 다시금 벽시계를 흘긋거렸다. 20분 지났어. 안나가 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생각이 막 스쳐갈 때 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엘사의 심장이 뛰었고 뱃속이 울렁였다. 갑작스런 공황상태가 그녀를 채웠다. 서류 가방을 집어들고 서둘러 제 사무실로 들어가 문을 등 뒤로 하고 닫았다.


내가 왜 숨고 있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안나의 사무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엘사?” 안나가 불렀다. 엘사의 심장이 목구멍에서부터 튀어 올라올 것 같다.


침착하자. 그녀는 문을 열고 머리를 삐죽 내밀었다.


안나가 제 책상 옆에 서 있었고, 커피가 든 캐리어, 두 개의 Timmy 가게 봉투와 노트북 가방을 그 책상 위에 털석 놓았다. 오늘따라 예쁘게 차려입었다. 주름진 블라우스와 딱 붙는 슬림스커트에 머리를 단정하게 묶어 올렸다. 엘사를 발견하고 안나의 얼굴이 마치 태양처럼 환해졌다.


“좋은 아침!” 팔을 뻗으며 안나가 인사했다. 엘사가 다가갔고, 뱃속이 갑자기 널을 뛰어 두 손을 너무 꽉 붙잡지 않도록 애썼다.


“좋은 아침.” 수줍은 듯 인사하고 안나의 품을 만나러 손을 뻗었다. 엘사는 뛰지 않은 자신을 칭찬했다.


안나는 꽉 껴안고 따뜻하게 키스해왔다. 미약하게 치약의 민트향 그리고 없어서는 안 될 안나의 향이 느껴졌다.


“헬가가 당신 때문에 놀란 모양이에요.” 키스에서 몸을 떼며 안나가 말했다. 두 팔은 여전히 엘사의 허리를 감은 채였다.


“헬가?”


“경비원 말이예요. 헬가가 그러는데 오늘 아침에 당신이 자길 보고 글쎄 기분 어떠냐고 인사하더래요. 나보고 당신에게 무슨 약 먹였냐고 물어보던데요?”


엘사는 살짝 화가 났지만 안나는 눈을 반짝거리며 웃었다. 엘사가 안나의 허리를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먹은거 같은데요?” 엘사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다시 안나에게 키스했다.


키스하는 매 순간마다, 엘사는 맥박이 요동치고 온 몸에 기분 좋은 열기가 퍼지는 것을 느꼈다. 밀착시켜 저를 감은 안나의 품을 사랑했다. 키스를 할 때마다 내면의 죄책감이 점점 줄어져 갔다. 잘못되었다는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안나의 손길이 움직였다. 꽉 껴안은 손을 살짝 풀고 엘사의 척추를 좇아 위로 흘렀다. 부지불식간의 떨림이 엘사의 몸을 훑었다. 안나의 손길은 너무 가벼웠지만 엘사는 기뻐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안나의 혀가 제 입술을 훑는 것이 느껴지자 저도 모르게 숨이 막혔다.


맙소사. 안나가 그럴 때마다 항상 놀랍다. 가벼운 터치에도 모든 신경이 한꺼번에 불붙는 것 같았다.


어떻게 반응해야할지도 몰랐다. 엘사가 경험이 없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명백했기에 안나가 왜 이렇게까지 저에게 빠졌는지 궁금했다.


안나는 상관하지 않는 듯 보였다. 두 손이 이제 엘사의 어깨까지 쫓아왔다. 한손을 뗐지만 바로 목 뒤를 쓸며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이 엉켰다. 안나의 혀가 엘사의 윗입술을 부드럽게 훑자 주먹이 쥐어졌다. 무릎의 힘이 풀리고, 새로운 감각으로 머릿속이 밝혀졌다. 안나가 키스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안나가 그녀를 책상 위쪽으로 이끌었다. 저를 지탱해주는 책상 덕분에 엘사는 편히 기대 완벽히 안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안나의 혀가 또 한번 엘사의 아랫입술을 훑었고, 엘사가 이에 응해 두 입술을 벌려 안나가 들어오도록 허락했다. 서로의 혀가 가볍게 만났다가 서로를 음미했다. 엘사의 손가락이 안나의 블라우스를 움켜쥐었고, 처음 느끼는 새로운 감각에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머리칼을 말고 있지 않는 다른 한 손이 엘사의 등허리로 따라 블라우스를 당기기 위해 자켓 안으로 미끄러져 흐른다. 두 입술이 맞닿은 채로 엘사의 바지의 허리춤으로 블라우스가 흘러나왔다.


안나의 손길이 맨 살갗에 느껴지자 엘사의 몸이 갑자기 튀었다. 가쁜 숨을 내쉬며 엘사가 떨어졌다.


안나가 멋쩍게 미소를 지었고 엘사에게 떨어졌다.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흥분했나봐요.”


하지만 그닥 미안해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으으음.......”


엘사의 얼굴에 홍조가 일었고 저도 느낄 정도였다. 손을 등 뒤로 돌려 블라우스를 다시 바지 안으로 정리하는 두 손이 떨리고 있었다.


“우리.... 그러니까..... 일해야 해요. 그리고 일도 많구요. 회의.”


“물론이죠.” 안나는 사실상 엘사 주위를 통통 튀며 잊혀졌던 Timmy의 봉지로 향했다. 안나는 어떻게 저렇게... 녹아버리지 않고 버틸 수 있지? 엘사는 여전히 책상에 기댄 상태였다. 안나는 봉투 하나와 컵 하나를 건냈다.


엘사가 떨리는 손을 간신히 진정시키려고 노력하면서 그것을 받았다. 안나가 그런 엘사를 유심히 바라본다.


“혹 내가 너무 밀어 붙인거 아니에요?” 안나가 물었다. 미소가 살짝 옅어지며 자신가 먹을 음식이 담긴 봉투 안으로 손을 넣었다.


엘사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아뇨.. 그저.. 음... 아직 거기까진 생각을 못했던 거라.”


안나가 작게 쿡 웃고는 눈길을 돌려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미안해하지도 않는 것 같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엘사도 마찬가지였다. 기분 좋은 압박감이었으니까.


“이게 뭔가요?” 안나가 건넨 봉투를 열며 물었다. 안에는 도넛이나 머핀이 아니라 아침식사용 샌드위치가 포장되어있었다. 엘사는 그걸 꺼내 자세히 보았다. 안나는 늘 다양한 곡물로 만들어진 베이글을 사다주었으니까.


“Real food.” 안나는 자기 손에 든 베이글을 흔들어보였다.


“중요한 일이 코앞에 있어요. 적절한 영양공급을 받을 필요도 있구요.”


“진짜 달걀은 없는것 같은데요.”


엘사는 한입 베어 물었다. 역시. 생달걀 느낌은 아니었다.


“하지만 단백질은 있어요. 당신이 최고의 위치에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으면 해요. 내가 모두에게 메모를 보냈어요. 모두들 11시에 도착할거예요. 점심식사를 곁들인 회의가 더 편안할 것 같아서요. 긴장도 풀어주고.”


엘사는 먹다가 베이컨이 목에 걸릴 뻔 했다. 엘사는 기침을 했고 목청을 가다듬은 후, 공포가 서린 듯 안나에게 눈길을 돌렸다.


“모두요? 그리고 무슨 회의요?”


“내가 어제 스케줄 짰거든요.” 안나가 설명햇다.


“적어도 이 빌딩 안에 있는 임원진들 말이에요. 지금 위성으로 메세지 보내는건 힘들더라구요. 참석자들 정리할게 너무 많아서 항공편은 엄두도 안나더라구요. 그래서 몇 명은 화상회의로 들어 올 거예요.”


한마디씩 더할 때마다 엘사의 당혹감은 점점 자라났다.


“왜요?”


라고만 간신히 내뱉었다. 샌드위치를 든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가 계란 조각이 바닥에 떨어졌다.


“당신은 그들과 대화해야 해요.”


안나가 말했다. 베이글을 한입 크게 물고는 카페모카와 함께 그것을 삼키고 말했다.


“위원회는 당신이 좀 더 사교성이 있길 바라요. 그래서 일단 임원진들부터 시작해야한다고 생각했어요. 직접 대면해서 보고서를 받아요. 당신이 도와 줄 문제들이 있는지 직접 봐요. 자녀분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도 물어 보구요.”


엘사는 당황하지 않으려 노력하기 위해 자신의 샌드위치를 빤히 바라보았다. 물론 안나 말이 옳았다. 젠장. 시작한다면 거기서부터 해야 했다. 그리고 가능한 빨리 해야 했다. 엘사는 심지어 안나의 추진력에 감동받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녀를 위협시켜왔던 공포감이 하루아침에 쉬이 바뀔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엘사는 평상시에 회의를 피해왔다. 각자 부서의 보고 같은 대부분의 일은 이메일로도 할 수 있고 그게 엘사가 가장 좋아하는 방식이었다. 생각할 시간도 필요했고 누구에게도 방해받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만약 어쩔 수 없이 회의를 해야 했다면 일대 일로만 하는게 좋았다. 그렇게 하면 당황해도 어느 정도 수습이 가능하니까.


그들 모두가 앞에 있으면, 엘사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하나도 기억나질 않았다. 물론 논의할 것들은 있었지만 제대로 정돈된 것도 아니고 모든 내용을 다 기억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마 상황을 더 악화시킬 것이다. 더 나아지기는커녕.


엘사는 수많은 생각과 걱정에 휩싸여 안나가 의자에서 일어나 곁으로 다가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저기.” 안나가 부드럽게 말했다. 엘사의 한 손을 잡아 끌어 그 손등을 엄지로 쓸어 부드럽게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각자 어떤 걸 말하고 질문해야 할지 내가 이미 정리해서 써왔어요. 알겠어요? 그리고 아직 두시간정도 시간이 있어요. 갑작스러운 일이라 당황한거 알아요. 하지만 지체할 시간 없어요.”


전부다 안나가 생각해낸 것이다. 엘사를 위해 안나는 분명 일요일 내내 이것들을 준비했을 것이다. 어느 훌륭한 사람이라도, 아니 완벽한 사람이라도 이렇게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나타나 그녀를 도와주지는 못 할 것이다.


“날 위해 이걸 전부 다 준비해 준거예요?” 믿기지 않아하는 표정을 지으며 엘사가 물었다.


“물론이죠.” 안나가 엘사의 손에 키스를 해주고 놔주었다. “이 샌드위치 다 먹어둬요. 해야 할 일이 아주 산더미 같으니까.”




이미 카페모카를 다 마셨지만, 회의실로 들어가서 안나는 다시 커피 한잔을 제 몸에 들이 부었다. 그리고 녹을 수 있을 만큼의 최대한의 설탕도 쏟아 넣었다. 엘사를 위해 이것저것 다 메모해 써놓느라 어제 새벽 늦게까지 잠을 자질 못했다. 그녀는 사랑과 카페인의 힘만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세탁실 매트에 앉아있는 동안에도 엘사를 어떻게 곤경에서 구출하느냐 하는 생각이 안나를 조여왔다. 엘사를 꺼내와 사람들과 대화해야 한다. 엘사과 상의할 시간도 없었다. 그래봤자 더 오래 걱정하는 것 밖에 안 되니까.


그만한 가치가 있지. 엘사의 일을 도와주는 건 마치 진흙에 빠져있는 보석을 발견하고 깨끗하게 광택을 내주는 일이야. 끝없는 생각 아래 숨겨진 평범한 바위 같지만 거듭할수록 또 다른 반짝거림이 계속 나타나잖아.


와 꽤나 멋진 비유인데? 안나는 웃으며 일을 착수했다. 머그잔과 달달한 쿠키의 빈 상자만 쌓여갔다. 미팅이 너무 형식적이지 않았으면 했다. 그저 그들에게 엘사 그대로를 보여주고 싶었다. 아렌델 회사의 얼음 여왕이 아니라. 이것이 점심 회의를 결정하게 된 이유였다. 사람들은 먹을 때 화내지 않는다. 유일한 걱정거리는 케터링 서비스(사무용 행사 음식)을 준비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사실이었다.


한스가 제일 먼저 도착했다. 잇따라 크리스토프가 들어왔다. 크리스토프는 손을 흔들고는 문과 가장 가까운 의자에 앉았다. 달달한 쿠키 두 개를 그새 먹었다.


“한스! 뭐만 하면 나타나네요?” 놀리듯 말했다. 이보다 더 기쁠 순 없었다.


“내 상사가 오늘 못 왔거든요.” 말하면서 테이블의 반대편으로 가 의자 하나를 부드럽게 잡아 뺐다. 앞으로 몸을 기울이고 살짝 윙크를 했다. “게다가.” 부드럽게 말을 잇는다. “베프를 보러오는 걸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어?”


안나가 웃었고 그 반응에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오늘 기분 좋아 보이네요? 엘사는 어때요?”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안나가 이제 막 말을 하려던 찰나 엘사가 회의실에 들어왔다. 길 잃은 강아지처럼 주위를 둘러보았고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안나가 벌떡 일어났다.


“완전 좋죠.”


한스에게 말하고 엘사에게 손짓했다. “이 자리예요. 엘사.” 안나가 한 의자의 등받이 부분을 두드렸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도착 할수록, 엘사는 스시가 담긴 점심 도시락을 먹기 보다는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안나가 엘사에게 웃으며 사람들에게 인사하라고 슬쩍 찌르자 그럭저럭 간신히 해냈다. 그에 안나가 기뻐 환히 웃고 임원진들은 당혹감을 애써 감췄다.


좋았어. 얼음 여왕처럼 보이지 않아. 약간 긴장한 것 같긴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쿠키와 함께 흔한 일상대화를 나누며 점심을 즐겼다. 안나는 엘사를 재촉하지 않고 적절한 시기가 왔을 때 이 회의를 주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그 이야기들을 그저 듣게 했다. 안나는 한스에게 업무에 대한 대화를 나눴고 엘사 옆이니 주말에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는 가급적 피했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사람들이 점심을 슬슬 다 먹어갈 무렵 안나는 엘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준비?”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게 물었다. 엘사는 다 먹지도 못한 스시접시를 내려 보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안나는 바로 눈 앞에 있는 한 마리의 사슴처럼 보이는 그녀에게 키스하길 바라면서 손을 뻗어 엘사의 어깨를 쥐었다. 엘사가 나설 차례가 왔다. 안나는 몸을 숙여 엘사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무것도 없는 내 모습을 상상해 봐요. 써준거 그대로만 읽어요.” *


그 손길에 엘사의 목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손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웁스. 괜히 말했나봐.



“아무것도 없는 저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엘사가 작게 속삭이고 잠시 멈췄다. 그녀의 어깨가 소리 없는 웃음을 담은 채 살짝 떨렸다. 안나가 씩 웃었다.


“그건 재미없잖아요.” 엘사의 목에 머물던 안나의 손가락이 그녀의 의자를 빼주었다.



엘사가 크게 목을 가다듬고 몸을 더 꼿꼿이 세우며 일어났다.


“이제 회의를 진행해볼까요.”


또렷한 목소리로 이어나갔다.


“제가 여러분들을 오늘 이곳에 부른 첫 번째 이유는 이런 회의를 한 달에 한번은 가지기 위해서입니다. 지금까지 이메일을 통해서도 효율적으로 일을 진행시켜 오긴 했지만, 직접 만났을 때 더 훌륭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 여러분께서 서로 맡은 분야의 보고를 듣길 원해요. 그러니 생각하고 있는 어떤 문제라도 자유롭게 말해주시구요. 이로서 아렌델 회사 내 공동체의식이 더 커지길 바랍니다.”


좀 형식적인데. 안나는 잘했다는 미소를 보내며 생각했다.


하지만 효과는 있어보여.


임원진과 팀장들이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대표가 갑작스럽게 “공동체의식” 에 흥미를 보인다니 혼란스러워하는 눈치였다. 단, 인사과 팀장인 카이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는 엘사의 그런 모습을 자랑스럽게 지켜보았다. 한스는 부드럽게 웃고 손을 테이블에 얹은 채 엘사의 모든 말을 집중해서 들었다.


“안나 써머즈씨가 여러분들에게 회의 일정에 대한 개요를 보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모든 이들이 타블렛에 문서를 꺼내기 위해 사방에서 두드리고 화면을 옆으로 미는 소리들로 가득했다.


“제가 제안하고 싶은 첫 번제 안건은 여러분들 각자가 부서에서 다루고 있는 사안들에 대한 간략한 보고서입니다. 현재 진행하는 프로젝트. 성과물. 그리고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저나 여러분 누구나 알아야 할 것들을 전부 말입니다.


안나는 의자에 몸을 묻었다. 메모를 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몸을 좀 편안하게 하고 무엇보다도 엘사의 상태를 살피기 위함이었다. 엘사는 한사람 한사람에게 집중해주었고, 주의깊게 들어주고, 안나가 미리 준비해줬던 질문들을 했다. 여전히 긴장하고 있어보이긴 했다. 등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꼿꼿했고 손을 무릎에서 꽉 쥐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해냈다. 그리고 그녀의 직원들은 응답했다.


각자의 면담 및 보고가 끝난 후에는 임원들끼리 대화하느라 약간의 텀이 있었다. 쏟아지는 주목이 잠깐 사라진 틈에 엘사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안나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고 엘사의 무릎에 제 한손을 얹었다.


그 손길에 엘사가 앉은 의자가 갑자기 덜커덩거렸고, 이를 눈치 챈 한스가 호기심에 눈길을 돌렸다.


“쥐가 나서요.” 엘사가 말하며 얼굴을 붉혔다. 한스는 웃더니 다른 사람과 하던 대화를 다시 이어나갔다.


엘사는 안나를 똑바로 보며 눈빛으로 “뭐하는 거예요.” 라고 말했다. 세상에. 엘사는 아마 안나가 자신의 아무것도 없는 벗은 모습을 상상해보라는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는지 민감해졌다.


좋아. 이제 시작인건가.


안타깝게도 안나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 안나는 손을 치웠다.


“계속해요.” 말을 이었다. “잘하고 있어요.”


엘사는 심호흡을 했다.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죠. 위즐턴 회사와 곧 있을 합병 문제로 여러분들이 궁금해하는 사항이나 중요한 문제가 있으면 이에 의논하려 합니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안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눈이 다시 노트로 향한다.



o



“사무실로 얼른 들어가 숨고 싶죠?” 안나가 엘사의 귓가에 속삭였다. 미팅은 끝났고 모두들 각자의 사무실로 들어가려 복도를 가득 메웠다. 엘사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안나를 향해 끄덕이는 그 얼굴에는 고마운 미소가 서려 있었다.



“그럼 내가 뒷정리를 할게요.” 안나가 엘사의 등 쪽으로 손을 쓸었다. 서로 대화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이 공간에서는 이 정도 스킨쉽이 최대일 것이다.


“잘했어요. 너무 자랑스러워요.”


안나는 저를 바라보는 엘사의 눈빛에 숨을 삼켰다. 감사과 안도감, 안나를 향한 다정함이 담겨있을 뿐 아니라 지금 당장 키스하고 싶어 견디지 못 할 눈빛이었기 때문이었다. 싱긋 미소짓고는 어질러져있는 커피잔들과 샌드위치 포장지쪽으로 몸을 돌렸다. 엘사는 뛰고 싶었지만 가능한 서둘러 제 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세상에나. 무슨 초딩들이 먹고 난 자리같네. 그녀는 쿠키조각을 치우며 생각했다.



“나 감동받았잖아요.” 문가에서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가까이 다가오는 크리스토프가 보였다.


“뭐가 감동적인데요?”


“얼음여왕.” 그는 엘사가 도망쳐 나간 문쪽으로 엄치를 획 가르켰다.


“진짜 사람 같았어요.”


“사람 맞거든요?” 어이없는 듯 말했다. “같이 좀 지내보면 알거예요.”


크리스토프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의자를 제자리에 넣으며 안나를 도와주었다.


“당신이 그렇다면야.”


“사실이거든요?”


“하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당신은 한스도 사람으로 보잖아요.”


안나가 한숨을 쉬었다. “아. 그 말 좀 또 하지 말아요-”


“내 말 들으면요.” 그가 안나 앞으로 다가와 허리에 두 손을 얹었다. “그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아직도 알아보고 있어요. 하지만 장담하건데 그건 당신의 얼음여왕과 관련된 일이예요. 그는 당신을 이용해 엘사와의 비밀을 캐내려 할예요. 키스를 이용할지도 모르죠...”


안나는 어느 부분에서 특히나 화를 내야할지 몰랐다. 안나는 대놓고 말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요? 글쎄. 한스랑 나는 더 이상 키스하는 사이가 아니니 잘 된건가요?”


크리스토퍼의 얼굴이 환해졌다. 혹여나 춤을 춘다면 꽤 볼만 하겠다고 안나는 생각했다. “세상에. 다행이다. 걱정했거든요. 그 행동에 혹할까봐. 다행히 정신을 좀 차린-”



“사실요. 크리스토프.” 그 말을 자르며 안나가 말했다. “한스는 나에게 여전히 좋은 친구예요. 그건 알아둬야 할 것 같아서요.”


눈을 가리는 앞머리를 치우고 문쪽으로 당당히 걸어갔다.


“그리고 나 이제 엘사랑 사귀어요.”


크리스토프가 순간 그 자리에서 얼었다. “엘사?!” 멀리서 들릴 만큼 큰 소리로 외쳤다.


돌아서던 안나의 발걸음이 멈춰졌다. 젠장. 그 말하는게 아니었는데. 안나는 재빨리 돌았다.


“다른 사람이에요.”


안나는 침착하려 애쓰며 말했다. 문밖에 엘리베이터 쪽을 살폈다. 다행히 임원 중 누구도 크리스토퍼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이라구요. 엘사가 아니라.”


태연한 웃음을 애써 지으며 말했다.


크리스토프가 팔짱을 끼며 능글맞게 웃었다.


“언제는 엘사라며요.”


“아뇨. 그 말 한 적 없어요.”


크리스토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안나는 크리스토프의 팔을 붙잡고 그를 복도로 끌어내 제 사무실로 끌고 왔다. 제 등 뒤에 문을 쾅 닫았다.


“그래요. 맞아. 엘사예요.”


안나가 빠르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입 밖에 내뱉기만 해봐요. 무덤까지 쫓아가서는.”


“저기. 저기. 저기. 한마디도 안할게요.” 그는 항복의 의사로 두 손을 올리며 재빨리 약속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스벤은? 스벤한테는 말해도 되지?”


안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선택권이 없었다.


“좋아요. 누구에게도 말할 사람이 아니니까.”


크리스토프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말할지도 모를걸?”


안나는 더 이상 옥신각신 하기가 싫었다. 제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지금 당장 회의를 위해 정리할 것들이 산더미였다.


“한스와 친분을 유지하는거 당신을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어요.”


“위험할거 없어요.”


“혹시 당신이 밀회를 즐기고 있는지 한스도 알아요? 그것도 대표랑?”


안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밀회 아니에요. 그리고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구요.”


“좋아요. 내 말 듣지 말아요.” 큰 한숨을 쉬었다.


“가봐야겠네요. 한스가 요즘 나랑 스벤한테 엄청 일 시키거든요. 지금 회의중이고.” 그가 날카롭게 말했다.


“회사 합병때문에 여기 안 바쁜 사람 없어요. 게다가 한스는 재무부 대표구요. 합병은 돈 문제가 우선이니까.”


크리스토프가 어깨를 한번 더 으쓱하고는 문으로 향했다.


“그렇게 말하신다면야.”


안나는 나갈 때까지 문 쪽을 노려보다가 다시 회의록으로 눈길을 돌리며 서둘러 타자를 쳤다. 너무 많았다. 이 걸 다른 비서에게.. 어쨌든 지금까지 들었던 것 중에 가장 멍청한 생각이네.


그녀의 타자가 느려졌다. 그리고 다시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개인비서가 있었다면 엘사와 달라붙어있을 시간이 더 많을 거니까. 내 비서한테 내가 하는 일을 싹 몰아주고 내 업무일지에는 엘사에게 마사지 해주기, 엘사가 얼마나 끝내 주는지 말하는것을 채우는거야.


한스에게 걸고 있는 전화가 자동응답으로 넘어가서야 안나는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첫 번째, 한스가 지금 회의 중이라 자기 전용 비서를 채용해달라는 요청을 받을 수 없다는 것. 두 번째, 엘사와의 키스로 머리가 어떻게 됐는지 그제야 제 개인비서를 두는 건 말도 안 된다는 것.


그냥 업무일지에 '엘사의 눈 바라보기'라도 추가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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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짧노트

“아무것도 없는 내 모습을 상상해 봐요. 써준거 그대로만 읽어요.” 

"아무것도 없는 저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엘사가 작게 속삭이고 잠시 멈췄다. 


naked 다 벗은, 누드의, 아무것도없는 중의적인 표현 




엘산나 무기미도팜 / 남덕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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